근황 및 일기
2023-12-27 22:24:09
위에 캡쳐는 내 블로그의 방문자 그래프이다.
애초에블로그를 시작하는데에 있어서 뭘 바라고 시작했다기 보다는..
예전에 네이버에서도 블로그에 조금씩 글을 썼었는데 거기서 재미를 붙이다 보니 내가 운영하는 블로그를 만들어보는건 어떨까 싶어서 제작하게 되었다.
방문자 수에 대해서 크게 기대를 한 것도 아니고, 다이어트 일지를 안 올리게 된지도 벌써 2달이 지났는데 왜인진 모르겠지만 조금씩 방문이 있다. 무슨 알고리즘일까?
구글 검색에서 들어온 사람도 있고, 페이스북에서 온 사람도 있고. 인스타그램에는 내가 블로그 주소를 올려놔서 그렇다 해도, 페이스북은 뭐지? 싶기도 하고.
다이어트의 경우에는 일단 어느정도까지는 성공했다. 현재 80 중반대를 유지중이지만.. 더 빼기에는 일상에도 지장이 있는 것 같고 정체기가 오다보니 멈추게 되었다.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사실 앞에 쓴 글 들은 내가 쓸 내용과 상관은 없는데 문득 글을 쓰러 들어와 보니 어느정도 방문자가 있어서 놀랐던 나의 반응정도로 생각해 주면 될 것 같다.
그냥 오늘은 별 생각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얘기하고 또 기록하고 싶어져서 들어왔다.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도. 두서 없이 떠들 예정이라서.. 이해 부탁드립니다.
나는 95년생으로, 한국 만나이로 따지자면 이제 28이고 곧 생일이 지나면 29살이 된다.
만 나이로 바뀌기 전까지는 빠른년생이었던 나는 사회적 나이로는 이미 30살이고, 태어난 년도로 치면 29살, 지금 나이는 28살이다.
어쩌다 보니 나이가 어려진 것 같아 기분 좋을 수 있지만 뭐 또 빠른년생들은 우리들만의 힘듦이 있었다.
예를 들면 사회적 나이로 말하면 괜히 형 대접 받으려 한다며 욕을 먹었고, 원래 나이를 얘기하면 이럴 때만 어려보이려 한다며 욕을 먹는다.
2013년에 내가 대학교를 처음 입학해서 술자리를 가게 됐을 때, 주민등록증 검사를 하면서 나 때문에 술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면 굉장히 미안했던 기억이 난다. 준코였던가?
나는 사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미안했던 기억만 있었던 것 같다. 그냥 항상 나 때문에 주변이 피해를 보는 것 같았고, 그저 항상 미안했다.
내가 어렸을 적엔, 집안 사정이 그렇게 여유롭지 못해서 주기적으로 이사를 다녔었다.
당시에 나는 부동산에 대한 경제적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왜 그렇게 이사를 다니는지 이해를 못했고, 이사갈 때마다 힘들어했다. 특히 힘들었던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나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 항상 뚱뚱하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았었고,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그들을 비난하거나 욕하고 싶지 않고, 그저 그들도 그 당시 어렸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초등학교 5학년에 힘들었던 이유는 내가 처음으로 호감을 가졌던 이성의 문제도 있었지만, 나를 처음으로 진짜 친구로서 인정해준 사람들이 있어서 그 관계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당시 용인 수지에서 살다가 현재 살고있는 기흥으로 이사왔는데, 부동산에 가셨던 부모님을 기다리며 차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막연히 이사를 간다는 사실에 슬펐다.
그렇게 지금 사는 곳에 와서는.. 처음 초등학교를 갔는데 담임선생님이 제일 덩치 큰 친구를 앞으로 부르더니 나와 악수를 시켰다. 친하게 지내라면서.
당시엔 좀 무서웠다, 이사를 다닐 때 마다 항상 그렇긴 했지만 처음 갔던 학교도 낯설고 주변 애들도 모두 처음인데 제일 무서워 보이는 학생을 굳이 불러서 악수를 시킨다는게 당시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어른이 된 입장에서는, 또 모르겠다. 어떻게 처음보는 학생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면 정답이 없는 것 같다.
요즘 학생들 얘기만 들어봐도, 왜 세대차이라는 얘기가 나오는지 알 정도로 격차가 심해지는걸 느끼는 요즘이라서 그런가보다.
아무튼 초등학교는 이사와서 별 탈 없이 지나왔고, 여느 학생들과 다르지 않게 중학교 가서도 열심히 공부하면서 살았는데 그 쯤에서 내 인생에 변곡점이 찾아왔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인데, 첫 사랑을 만나게 됐다. 사실 첫 사랑이라는게, 나는 지금에 와서는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말 그대로 처음으로 사랑하게된 사람을 위해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나는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만나준다는 말에 여름방학 약 한달 반동안 20kg 을 감량했고 상대방은 약속을 지킨 나를 떨떠름해 하는 느낌이긴 했지만 약속대로 교제를 하게 됐다.
그런데 나는 그 당시 연애를 해본 적도 없었고, 연애에 대한 환상만 가득했다. 행복하게 영화를 보러 가고, 손 잡고 걸어다니고 이런 상상을 했었는데 나한테 돌아온 말은 모두에게 비밀로 만나자는 말이었다.
나는 좋아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만나주는 것 만으로도 마냥 좋았고, 그렇게 만나고 나니 교제하는데에 있어서 내 기대와 달라 어느 순간 내가 이별을 고하게 됐다.
정작 그렇게 말한 나는 그 이후로 너무 힘들었다. 웃기는 상황이지, 내가 헤어지자고 해놓고 내가 힘들어 하다니.
겨울 방학 내내 우울증을 앓으며 지냈다. 그 당시엔 내가 스스로 우울증이라고 생각을 못했고, 지나고 보니 내가 많이 힘들었구나 싶더라.
중간에 일들도 많기는 한데, 생략하고. 고등학교를 들어가게 됐다.
그래도 중학교 때 까지는 공부를 어느정도는 했던 터라 당시 그래도 공부를 중위권? 중상위권 하는 학교를 들어갔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 웃기긴 하지만, 다이어트를 하고 나서 이전과 다른 외적인 모습 때문에 친구들이 나를 궁금해 했고 나와 친하게 지내려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와 동시에 나는 옷 입는 것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관심을 가지다 보니 모델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수료를 하기까지 이르렀다. 물론 지금은 모델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열심히 다녔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장 정신적으로 어린 시절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도 안하고 17살~20살을 고를 것이다. 그 당시의 나는, 내 주변 상황이 달라진 것에 대해서 내 스스로 적응을 하지 못한 상태였고, 어찌보면 자만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그에 따라 주변 친구들에게 실수도 많이 했다.
내가 그 전에 친구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호의나 친구를 만나기 위해 했던 노력 등에 비해서 너무나도 쉽게 친구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내 스스로 자아도취에 빠졌던 것 같다. 그게 부끄럽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에 와서도 그런 호의를 느끼기 때문에 지금은 내 사람을 나도 같은 호의로 보답하려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내가 스스로 너무 거만했던 것 같아서 하는 얘기이다. 물론 그것도 경험이겠지..
고등학교 다닐 때 내신은 진작에 포기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3월 모의평가? 를 봤었는데, 성적을 보더니 엄마가 성적이 이게 뭐냐고 했었는데 왜인지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당시 3월모평 평균이 2등급 정도였는데, 고등학교에서도 나름 개학하기 전에 성적 상위권들만 불러서 상급반 수업을 따로 듣기도 했던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엔 2등급이라는 숫자가 어느정도의 위치인지 가늠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동생은 언제나 공부를 잘 했고(결국은 카이스트에 진학했다), 아빠도 1등을 놓친적 없이 살아오셨다는 얘기를 매일같이 들으며 자라왔기 때문이다(고려대). 당시엔 내가 공부를 잘 하는 편인지도 몰랐고, 주변 친구들도 비슷한 성적대를 맞았던지라 내가 너무 못나다고 생각했다. 공부에 있어선 항상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냥 계속 뭔지 모를 경쟁속에서 살아갔던 듯.
그리고 영어도 문법 위주로 공부하지 않았어서, 당시 명사가 뭐냐는 질문에 대답도 하지 못했던 나는 당시 생각으로는 아, 내가 해왔던 공부 방식은 고등학교에서는 먹히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이 크게 들었었고, 그 3월 모의평가 성적표를 받았던 당시 지금도 생각나는건 아빠가 뒤에 백분율을 보시더니 상위 10% 정도에 드는건데 이 정도면 잘 하는거 아니냐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근데 당시의 난 그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게 내 인생에서 고등학생의 시작이었고 공부를 아예 놔버렸다, 친구랑 시험볼 때 번호를 하나씩 정해서 누가 더 점수를 잘 받았는지 내기를 할 정도였다. 고등학교 1학년 평균 내신은 7.9, 2학년 평균 내신은 8.3 인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그 쯤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평가원 모의고사를 볼 때 제대로 풀어보면 항상 3~4등급대는 나왔던 것 같다.
진짜 뭐 고등학교 다닐 때 까지는 이렇다 할 꿈이 없었다.
어릴 땐 마냥 아틀란티스호 같은 거대한 로켓이 우주에 날라간다는 사실이 멋있어서, 알아보다보니 로봇공학자를 꿈 꾸다가.
내가 손재주 좋다는 것을 알게 되니 잘 하는 것을 살려야 하나? 싶어서 치기공사를 꿈 꾸기도 했었고,
고등학교 2학년 말에는 내가 비행기를 좋아했다는 사실 때문에 알아보다보니 파일럿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수능을 본 이후 항공운항학과를 지원하게 됐다.
사실 내가 성적이 좋았다기 보단 면접에서 점수를 잘 받은 경향이 있는데.. 어쩌다 보니 대학까지도 가게 되었다.
대학교를 가게 되면서 굉장히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전공의 특수성 때문인지 다른 분야에 종사 혹은 전공을 하다가 넘어온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빠른 년생에 법적으로 성인이 되지 않은 채 대학교에 입학한 꼬맹이였고, 형들을 우러러보게 됐다. 또 어쩌다 보니 친하게 지내게 됐고 가까이 하면서 나도 모르게 형들의 어른스러움에 융화됐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주변 동년대의 친구들한텐 어른스럽단 소리를 많이 듣게 되었고, 그런 소리를 듣다 보니 나도 더 어른스럽게 행동하게 되고 스스로 조심하게 되었다.
그렇게 대학교를 다니다가 2학년 때에(정확히는 2학년 말, 3학년 초) 비행을 시작하게 되고, 동기들은 대부분 비행을 시작하기 전에 군대를 다녀오는 방향성을 택했다.
나는 당시 공군조종장학생 이라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서 남아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업용조종사 자격증 까지 다 취득하고 결국은 장교가 아닌 의경으로 군 복무를 대체하게 되었다.
내가 자격증을 거의 다 취득하고 4학년이 되었을 때 동기들은 전역을 해 복학을 했고, 나한테 군대 갔다온 것과 비행 자격증을 바꾸자는 얘기를 많이 들었었다.
나는 당시 23살이었는데 대학교 4학년이었고 대학교엔 후배들이 많았으니 뭔가 스스로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었다. 비행 자격증 취득을 위해 1년 휴학까지 하면서 24살이 되었고, 군대를 다녀오면 26이라고 생각하니 그 2년이 너무 아까웠다.
아무튼 뭐 비행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힘들긴 했다. 학교 선배들이 학교 사정으로 비행을 늦게 시작하게 되면서, 원래라면 2학년 2학기부터 시작해야했을 비행을 3학년 1학기에 돼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심지어 아주 적은 소티로.. 그러다보니 보통 멀티레이팅을 하는 4학년 2학기 전에 사업용 조종사 과정까지 끝내려면 조금 빠듯했었다. 그래서 휴학을 하게 됐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사업용을 취득하고 군대를 갈 생각으로 임했어서, 군대 가기 전엔 무조건 취득해야지 했는데 공단 필기평가 5과목 중 AIM에서 여러번 탈락하고 광주에 위치한 교통안전공단에서 엄마랑 통화하며 울었던 적도 있다.
이렇게 저렇게 사업용 조종사 자격증까지 취득하고, 조금은 늦은 나이에 군대(의경)에 입대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논산 훈련소를 들어갔다가, 경기남부(화성) 경찰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의경으로 근무했다.
전역을 하고 나서, 바로 대학을 복학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주변에선 만류하는게 대부분이었다. 왜냐면 항공쪽은 비행경력중지 라는게 있어서, 차라리 한번 군대 때문에 중지됐을 때 조금 더 쉬고 오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또 그런 것 같아, 그 시간에 영어공부를 하기로 했다.
강남에 극한스피킹을 다녔다. 고급반까지 찍고, 점점 성장속도가 더딘 느낌이라 학원비의 부담으로 그만두게 됐다.
그 이후 다시 복학을 했고, 멀티 레이팅을 취득하면서 동시에 졸업을 했다. 당시 비행시간이 240시간 정도 됐었는데, 항공사에 조종사로서 취업하려면 최저가 250시간이고 메이저(국내)의 경우는 1000시간이 기본이다. 그래서 보통은 교관과정을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학생을 가르치면서 나도 DUAL 로 비행경력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하필 코로나 때문에 항공사 취업이 힘들어지면서 교관 수요가 많아졌다. 나도 교관을 생각했었지만, 군대를 다녀오면서 다 까먹어버린 나의 비행 뇌세포와 여러가지가 겹쳐서 결국 교관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많이 생각했던 부분은, 아무리 전문직이라지만 이런 특수한 상황 때문에 내가 준비해왔던 것들이 좌지우지 된다는 것이 굉장히 큰 충격이었다.
어떤 직업이 안 그렇겠느냐 할 수 있겠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20대 초 중반을 비행 때문에 공항 근처에서 살면서 그저 비행 스케줄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살았던 기억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름엔 열심히 살아왔는데, 하는 보상심리일까?
한편으로 나는 그런 기억 때문에, 뭘 해도 잘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집에서 있을 바에 뭐라도 해보자 생각했고, 그 실천이 아르바이트였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내가 처음 그렇게 바깥으로 나가면서 생각했던 것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라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배울 생각으로 나가면 열심히 살 것 같았는데, 스스로 너무 나태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아빠 회사에서 잠깐 일을 도와드리게 됐다. 근데 아빠 회사에서도 다를 줄 알았는데 나는 똑같았다. 아빠가 나를 배려해주시는 만큼 뭔가를 더 열심히 하려 할 것 같았는데 그냥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다보니 어느순간부터는 내 스스로 한심하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어릴 땐 누구나 다 ‘나는 잘 될거야’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꿈에 대해서 누구도 짓밟지 않는다. 어리고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성장한 나는, 정작 나이가 이제 서른이 되어가는데. 내가 서른일 때에는 뭔가 이뤄져있을 줄 알았다.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리고, 안정도 찾고. 막상 와보니 그냥 나는 아직도 10대 철부지인 것 같은 생각이다.. 부모님이 새삼 대단하시다고 느끼게 된다.
사실 이 글을 읽게 될 사람이 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평균으로 따지자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살며 복에 겨운 소리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지만서도, 지금에 와서는 패배자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그런 생각 때문에 우울증 아닌 우울증도 많이 겪었고, 금전적인 문제도 겹치면서 진짜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었다. 어차피 이 또한 상대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기에, 욕할 사람은 욕해도 된다.
그냥 생각하기에는, 주관적이긴 하지만. 이 글에 다 담을 순 없어도 나름엔 힘든 시간도 견디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결과만을 중시한다. 외삼촌과 아빠가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있다, 너가 진짜 비행의 꿈을 이룰 때 까지 열심히 한건 아니지 않냐고.
어느정도는 공감하고, 뭐라 할 말도 없다. 왜냐면 대부분은 통용되는 말이기 때문인데, 항공쪽이 특이케이스라 그렇지,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제약이 많다. 나이가 너무 많아도 안되고, 적어도 안되고, 비행시간이 너무 많아도 안되고 적어도 안되고, 보통은 경력이 쌓이면 쌓이는 대로 인정해주지만 항공쪽은 그렇지 않다. 적당한 것을 원하는 것 같다.. 부기장으로 취업하려는 사람들은 차고 넘치는데 수요는 아직까진 적기 때문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기도 한데, 교관을 안 했어도 교관을 왜 안했지? 라는 의문을 품는 한 편 교관을 해서 비행시간이 많이 쌓였어도 왜 지금까지 취업이 안되고 비행시간이 이렇게 쌓였지? 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보지 않고서, 내 생각은 무시하고 쉽게 얘기하는 것 같아 당시 슬펐었다.
요즘에 와서 느끼는건, 진짜 인생에 정해진 답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선택하면 후회가 없겠느냐 하면 그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럼 누가 정해줘서 따라간다면 후회가 없겠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도대체 정답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정답을 원하는 내 자신이 이상한 것 아닐까? 그럼 정답을 원하는 나를 만들어낸 이 사회가 이상한건가?
아빠가 한번 쯤 그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었다. 아빠에게 할아버지가 법대를 가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 땐 내가 하고싶은 것 해야지 왜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그렇게 말하셨나 싶었지만 지금은 그 말 들을 걸 그랬나? 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었다. 물론 이 말에 비하인드는 많다.. 결과적으론 지금의 아빠도 잘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엄마나 아빠나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의 나는 시대가 바뀜에 따라서 나도 바뀌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에 느끼는건 지금의 나도 결국 점점 갇혀가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로 성실함의 미덕이란 말의 의미에 대해서, 라던지 말이다. 말은 쉽지만 절대 쉽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런 것들이 쌓인 내 모습이 스스로에게도 영향을 많이 끼치게 되고 주변에는 더 큰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렇게 꼰대가 되어가는걸까?
결국 나는 내 스스로 깨어있다는 생각에, 현실도 따라가지 못하고 내 생각도 따라가지 못하는 말 그대로 도태되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나는 너무 스스로 쉽게 취해버린 이득들에 대해서 내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자만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하다보니 벌써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는 사회적으로써의 성인이 되고 나서도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 정신적으로 힘든 것 같다.
아직도 정답은 모르겠다. 그저 본능적으로 아는 것은, 결국 내가 힘들고 위태할 때 이겨내면 스스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내가 힘들 때 주변에 티를 안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주변에 얘기한다. 특히 가족들한테.. 가족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떄문에 나도 반대로 언젠가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은데, 그 과정이 쉽지 않은 것 같다.
오늘 글을 쓰게 된 것도, 사실 정답도 없고 내 생각도 뭔지 모르겠다. 그냥 지금 이 생각들을 내 스스로 정리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지금껏 잘 살아왔다고 할 수 있을까? 내 나름에는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객관적으로 바라봤을 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표들이 쉴 새 없이 내 머리속에 꽂힌다.
누구나 성공을 꿈꾸지만 성공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누구나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성공은 커녕 다가가지도 못했지만 어쩌면 비행을 한다는 그 이미지와, 나의 내적인 것 보다는 외적인 것 때문에 그 것들을 미리 누렸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슨 삶을 살고 있는걸까?
오늘 아침엔 배우 이선균씨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됐다. 사실 요즘 티비를 잘 보지도 않고, 연예계에 별 관심이 없는 편이라 내용은 잘 모르는데 왜인지 남일 같지 않았다. 나도 최근에 비슷한 생각을 했기 때문인가?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그 기사를 보고 잠시나마 받았던 충격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젠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진짜 주저리주저리 한 듯..
언젠가 내가 이 글을 다시 읽을 즈음엔, 내 스스로 성장한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다.
Table of Contents
댓글 목록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